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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자유/경제적 자유를 위한 공부

경제적자유#21 손자병법, 그 모든 것의 병법

by 방구석포스트 2021.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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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 춘추 전국시대 . 평생 사치스런 생활을 하며 어릴 적부터 향락을 익힌 왕실 궁녀들은

궁 밖의 세상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찌보면 순진무구하기까지 한 그녀들의 목숨을 단칼에 참혹히 거두어 간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익히 알려진 손무자(孫武子)다

 

경제적자유#21 손자병법, 그 모든 것의 병법

 

당대의 용사이자 철학자며 오늘날까지 수많은 지식인들로부터 

교양의 양식이 되고 있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저술한 손무(孫武)

 

그의 문헌이 병법서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세상으로부터 조명받은 것은 

전쟁에서 나아가 인생의 승리 비결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자는 손자병법의 내용을 세세히 익히고 활용할 수만 있다면 보다 불리함은 피하고 이점을 취하여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확언한다

게다가 손무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건 마치 어둠 속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것과 같다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손자병법의 전술과 전략은

미국 역사상 유례없던 규모의 전투 작전 성패와 더불어 나치의 몰락도 예견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와 함께 

베트남에서 무기력하게 철수해야 했던 미군의 패인 역시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일까

 

자 지금부터 그 내용을 꼼꼼히 뜯어보도록 하자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오나라(吳) 왕 합려(闔閭)는 호전적인 주변국에 의해 풍기는 전란의 기운으로 언제나 걱정이 많았다

 

허나 합려의 곁엔 중국 사상 최고의 지략가 중 하나로 꼽히는 손무가 있었고 

그는 시시각각 자국을 노리는 침략자들로부터 위태로운 나라를 지탱했다

 

 

당시로는 전략을 펼침에 있어서도 세세한 전투의 승패가 크게 중시되었는데 

손무는 특별히 거시적 안목을 견지한 걸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전쟁에 있어 단지 군사의 수로 상대를 압도하여 굴복시키려 함은 어리석은 책략이며 

반대로 적은 수의 군대라 할진대 잘 훈련시킨다면 배를 넘는 거대한 군세라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확실한 명령 하달 체계와 지엄한 군법을 비롯해 

군의 기강을 바로잡음이 전쟁의 승패를 가를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임을 알았던 손무

 

덕분에 그는 유명한 일화를 빚는데 바로 두 궁녀를 목 벤 것이다

 

 

사실 당시 오자서(伍子胥)로부터 천거받은 손무는 

어떻게든 오왕 합려로부터 자신의 역량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웃듯 자신의 총애를 받는 왕실 궁녀들도 

잘 훈련받은 군사처럼 부릴 수 있겠냐는 왕의 의심 가득한 제안을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궁녀들을 모아 놓고 몇가지 명령에 따른 동작을 선보인 손무는 

개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궁녀 둘을 부대장으로 삼으며 휘하 궁녀들의 기강을 책임토록 했다

 

허나 군법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을 뿐더러 고작 궁녀에게 엄중히 내려지고 있는 군령을

애초에 얼토당토 않다 여겼던 그녀들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무거운 분위기의 무대를 되려 우습고 재밌게 생각했다

 

 

따라서 손무가 처음 하명했을 때 궁녀들은 그저 소매깃으로 웃음을 훔칠 뿐 그 어느 누구도 명받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혹스러울 법도 한데 얼굴빛 조차 흩뜨리지 않았던 손무는

우선 장수인 자신의 지시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은 탓일 거라며 다시금 궁녀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북의 울림과 함께 오와 열을 맞추어야 할 궁녀들은 

이번에도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제자리에서 웃음만 보였다

 

이에 손무가 이르길,

'명령이 불분명하여 병사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음은 장수의 잘못이라 할 것이나 

명령이 명확한데 따르지 않음은 필시 부대장의 책임이다' 하니 그 즉시 칼을 뽑아 지휘관으로 삼았던 두 궁녀의 목을 쳤다

 

 

이에 합려는 궁녀들에게 그 같은 처벌은 너무 가혹하다 여겼으나

손무에게 전쟁이란 생사를 가르는 것이었다

 

또한 이처럼 전쟁에 대한 손무의 확고한 개념은 그가 저술한 병법서에서도 주요 원칙으로 통했는데 

모든 군사가 이를 이해하면 장(將)부터 졸(卒)에 이르기까지 승리에 대한 동기가 절로 일어나며 군의 기강이 탄탄해진다 했다

 

 

물론 앞서 처형당한 두 궁녀를 뒤로 하고 새로이 가려뽑힌 두 궁녀를 필두로 한 오나라 왕의 여자들은 

이제 손무의 손짓 하나에도 필사적인 집중력을 보이며 일사분란히 명령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합려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보인 손무에게 총괄적인 군 통수권을 일임한다

 

 

사실 합려에게 있어서 많은 인재들 가운데서도 손무같이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자가 특히 필요했던 것은 

당장에 급히 막아내야 할 적인 초나라(楚)가 약 30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자랑하던 반면 

오나라는 긁어모은 게 고작 3만 3천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손무는 아랑곳않고 이런 오왕의 기대감을 훨씬 웃도는 전공을 세우게 되는데 

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그가 보여준 전략 전술이 곧 걸작, 손자병법의 토대가 되는 것들이었다

 

 

그 이름값을 하는 손자병법에는 중요한 지침들이 가득하나 

그 중에서도 손무의 철학을 관통하는 세 가지 주요 원칙이 있었으니 그 첫번째가 다들 익히 알고있는 

 

"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으며

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

그러나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면 싸움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이다

 

 

즉 오늘날에 빗대어 보면 전쟁에서 상대를 안다는 건 흔히 난무하는 정보전을 일컫는 것으로 

특정 정보는 무려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만한 큰 힘이 있다는 걸 우린 이미 과거에 수차례 경험한 바 있다

 

 

또한 손무가 말하길,

 

"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백 번 싸워 백 번을 모두 이긴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최선의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라고 했다

 

 

손무가 말하는 최선의 방법은 외교적인 교섭으로 적의 수를 꺾는 것과 

더불어 상대의 동맹관계를 어지럽혀 적국을 고립시키는 걸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전투란 그 크고작은 규모에 상관없이 언제나 인명 피해 및 재산적 손실이 잇따르는 것이기에 

손무는 직접적인 충돌보다 꾀로써 승리를 따내는 지휘관을 보다 높이 샀다

 

 

마지막으로 

 

"夫兵形象水 水之形避高而趨下 兵之形 避實而 擊虛 水因地而制流 兵應敵而制勝."

 

'무릇 군대의 형세는 물과 같아야 한다

물의 형세가 높은 지대를 피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군대의 형세도 적의 건실한 곳을 피하고 적의 허술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

물은 땅으로 말미암아 그 흐름을 제어하고 군대는 적의 상황에 따라 승리하는 방법을 제어함으로써 변화를 꾀해야 한다' 라 하였다

 

 

당연한 말을 줄줄이 늘어놓는듯 하나 

따지고 보면 적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는 것부터 결코 쉽지 않을 뿐더러 

때와 상황에 따라 물 흐르듯 변화하는 전략 전술을 구사한다는 건 분명 보통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수많은 전투가 단순히 무력과 용맹을 앞세운 정면 대결로 이루어졌다

 

손무의 말대로라면 각 전투의 영광은 중요치 않은 것이며,

비록 한때 적에게 비웃음을 사더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책략이 되는 법이건만 

세상 모든 이가 병법의 핵심이 되는 이 가르침을 실천하진 못했던 셈이다

 

 

또한 애석하게도 한동안 중국의 황제나 일부 고위층 및 학자들에게만 읽히며

1천년 이상 베일에 싸여있던 손자병법은 오늘날 인류 3대 병서로 꼽히는 걸작임에도 불구하고 

8세기 일본을 시작으로 처음 세계에 공개되었고 이후로도 긴 세월을 거쳐 18세기나 되어야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 등에 전파될 수 있었다

 

 

물론 그 명성은 금세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갔으며 

최근까지도 수백 권의 교양 서적이 손자병법으로부터 파생되어 출간되었다 

 

또한 손무의 가르침은 본디 정체가 병서인 만큼 미 육군사관학교 등에서 필수 과목으로 채택되고 있음은 물론이요

이제는 스포츠를 비롯해 정치, 경영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자 그럼 다시 춘추 전국시대로 돌아가서,

 

오와 초의 전쟁으로 곧바로 시험대에 오른 손무의 병법술은 어떻게 펼쳐졌을까

 

 

앞서 말했듯 당시 초나라의 국력은 오의 것에 비할 게 아니었다

 

분명 수 배에 달하는 군사력 차이가 있었으며 적의 대군을 통솔하던 것은

초나라의 영윤 낭와(囊瓦)로 권력욕에 사로잡힌 탐욕스러운 자였다

 

 

그리고 이제 그런 적의 대군이 국경을 넘어 물밀듯 쏟아질 것인즉 

수적 열세에 몰린 오군은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 꼴이었다

 

허나 손무는 훗날 전신으로 통하는 한신(韓信)이나 곽거병(霍去病), 백기(白起) 등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중국 최고 명장 중 하나

 

보통은 이런 상황에선 몸을 웅크리고 세를 보다 단단히 하여 적의 침공을 대비하기 마련이거늘 

손무는 오히려 진를 박차고 나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선공을 펼쳤다

 

 

다만 손무의 오군은 적을 정면으로 맞서는 게 아니라

주로 외진 곳에 홀로 떨어진 주둔지나 접경 지역의 취약지를 골라 공략했다

 

군사의 수는 딱히 중시하지 않았던 손무였지만 

어쨌든 적군의 수가 실로 압도적이었으므로 정면 대결은 득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손무는 아군의 기동성을 살려 적 후방 및 측면을 빠르게 치고빼는 식의 전술을 구사했으며

이로써 초나라 군 전력의 분산과 사기 저하를 유도했다

 

더불어 손무는 최대한 자주 적을 들이치며 빠르게 초나라 군 진법 양상을 파악하려고 힘썼는데 

이는 자신보다 덩치 큰 적을 상대로 하여 기동과 기습, 기만을 극대로 살리고자 한 전략이었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름난 명장들의 전쟁은 언제나 전력보다 지략이 승패를 가르는 핵심으로 작용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의 먼치킨인 이순신(李舜臣)이 그러했으며 중국 땅에선 금 태조 아골타(阿骨打),

서양으로 넘어가면 알렉산드로스 3세(Alexander the great)나 용병술의 귀재로 통하는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20세기 최고의 전략가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의 전쟁이 그러했으니 말이다

 

물론 이같은 명장들과는 살아온 시대를 달리하며 개중에 가장 먼저 업적을 이룬 격인 손무(기원전 545년 경 ~ )지만

그는 지략이 풍부하면 어떤 난황도 격파하여 승리로 이끌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특히 손무의 병법술은 서양의 체스보다 동양의 바둑을 연상시킨다

 

이미 그 룰부터 소모전에 바탕을 둔 체스는 다들 알다시피 후반부에 들어서면 피차 판 위에 남아있는 말 수는 몇 안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각 말은 저마다 정해진 계급이 존재하고 특정 방식으로만 움직이며

비록 그 궁극적 목표는 왕(King)을 잡는 것이지만 그 과정상 상대방 말을 보다 많이 제거하려는 노력이 불가피하다

 

 

이에 반해 동양의 바둑은 텅빈 바둑판에서 최소한의 돌로 최대의 영토를 차지함이 그 승리 조건이다

즉 상대를 꺾기 위해선 보다 자원 효율적인 전략이 필요하며 바둑의 진정한 목적은 적의 철저한 파괴가 아니라 공간의 정복에 있다

 

따라서 잘게 나눈 아군을 광활한 전장 곳곳에 배치하여 이른바 유격전(遊擊戰)을 펼치며

초나라 군중의 세가 강한 곳은 피하되 취약한 곳을 노려 들이친 손무의 전략은 흡사 바둑과 같다고 보여진다

 

기원전 500년경 춘추 전국시대

초나라에 대한 손무의 치고빠지기식 게릴라 전술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손무의 맞상대였던 초나라 영윤 낭와와 그 휘하 지휘관들은 지속적인 오나라군 기습 공격에 애가 탔고 병사들 사기는 바닥을 쳤던 것이다

더불어 그들의 전쟁을 뒷받침할 자금과 군량 역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낭와는 이같이 불리한 형국에 결국 동맹국들에게 병력과 물자를 요청한다

 

허나 이미 여러 지방에선 손무의 물오른 기세를 경계하고 있던 바 일부 동맹국은 되려 오나라와 손을 잡아버렸다

더불어 초나라의 고관들은 그들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낭와에게 신뢰를 거두었다

 

물론 배신엔 마땅한 응징이 따르는 법

그 길로 군사를 돌린 낭와는 이제 초나라를 배신한 채나라()를 치러 북진하게 된다

 

 

손무에겐 이런 상황이 딜레마와 같았다

 

새롭게 동맹국이 된 채나라를 방관하자니 머잖아 파멸될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초나라 군대와 야전에서 맞서자니 그 전력이 아직 넘볼만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무는 곧 명쾌한 답을 내리는데

수중의 군사 중 일부를 떼어 미끼로써 낭와의 대군을 유인해내고자 한 것이었다

 

 

"故善動適者 形之 適必從之 予之 適必取之 以利動之 以卒待之."

 

'적을 잘 선동하는 자는 거짓으로 불리한 세를 취하고 이로써 적이 필히 아군을 추종하게 한다

적이 비로소 미끼를 탈취하고자 적병을 동원하면 기다리던 아군의 병졸로서 이를 대적한다'

 

손무는 병법의 대가답게 자신의 책략으로부터 적의 움직임을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채나라의 도읍을 둘러싸던 낭와의 군대가 우회하며 손무가 던져놓은 오나라군 일부를 쫒도록 만든 것이다

 

실로 칼 한번 뽑아들지 않고 채나라를 구한 격이었다

 

 

다만 이는 뒤가 없는 계책이었다 

채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게하는 대신 손무가 던진 오나라군이 되려 포위당하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곳에 병사들을 배치했다

손무는 죽음을 코앞에 두면 되려 필사적이고 용맹해지는 군사들의 심리를 꿰뚫어봤던 것이다 

 

 

이런 막다른 곳에서의 대치를 두고 손자병법은 '焚舟破釜(분주파부)'라 일컫는다

 

"帥與之深入諸侯之地 而發其機. 

焚舟破釜 若驅群羊 驅而往 驅而來 莫知所之."

 

'장수가 사졸과 함께 적국 영토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때는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이 돌아올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타고 건너온 배를 불사르고 솥단지를 깨어 사생결단의 투지를 견고히 한다 

이에 병사들은 사령관의 의도도 알려하지 않고 모든 것에 망설임이 없으니 장군은 이들을 마치 양 떼를 모는 것과 같이 쉽게 지휘할 수 있다'

  

 

이는 훗날 한신이 정형 전투(井陘戰鬪)에서 조나라 대군을 맞아 배수의 진(背水陣)을 치고 버텼고 

결국 우회한 별동대가 조나라군 진지를 들이치며 대승을 거두었던 것과 상황이 같았다

 

또한 파부침주(破釜沈舟)란 유명한 고사를 남긴 항우가 진나라 장수 장한을 맞아 거록에서 타고 온 배를 모두 침몰시키고

솥과 시루를 깨며 오직 3일치 식량만을 들려주어 죽기로 싸움으로써 적을 궤멸시켰다는 거록대전(巨鹿大戰)과 같았고

가까이로는 한강을 뒤로 한 채 왜놈들과 맞서 필사의 항쟁을 펼쳤던 권율의 행주대첩(幸州大捷)과 같았다

 

 

 

자 그럼 초나라의 낭와는 과연 이보다 나은 인물인가?

 

물론 아니다

 

손무의 주력 부대를 섬멸코자 말머릴 돌렸던 어리석은 낭와의 초군은 

그로 인해 진퇴양난의 국면에 들어서게 됐으니까 말이다

 

애시당초 견고한 도성을 공격할 맘이 없었던 손무의 2만 정예병이 대기하다 그대로 낭와의 전방을 쳤고

배수진을 치며 버티고 있던 일부 오군이 초군의 뒤를 추격해 와 후방을 들이치니 완전히 포위된 격이었다

 

 

기세가 흐트러져 갈팡질팡하는 군대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

 

결국 손무는 지략으로 적장을 압도하며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철저한 준비와 더불어 적을 흔드는 기만술, 과감한 결단이 만들어낸 의미있는 승리였다

 

 

그러나 손무는 처음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질 때 역시 홀연히 그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관해선 많은 설이 있으나 특히 오왕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夫差)가 향락을 일삼자

실망하여 멀리 떠나 은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손자병법의 첫 문장은 이렇다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

 

'전쟁이란 나라의 중대사이며 나아가 생사와 존망의 갈림길이 되는 것이니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여러 국가들이 전쟁을 벌이며 자칫 간과하기 쉬운 물적 비용이나 인적 고통을 각인시키고

과연 전쟁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인지 되묻는 무엇보다 중요한 글귀이다

 

 

또한 이르길,

 

"怒可以復喜 可以復悅 亡國不可以復存 死者不可以復生."

 

'노여움은 다시 기쁨이 될 수 있고 성냄은 다시 즐거움이 될 수 있지만

망한 나라는 다시 존재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소생할 수 없다' 라고 했으니,

 

현명한 자라면 전쟁에 대해 언제나 신중하게 고심하고 결정해야 함을 이르며 

싸움이란 되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임을 일깨우는 손무의 소중한 가르침이다

 

 

 

오늘날 여러 군 장성과 최고경영자들(CEO, Chief Executive Officer)

프로 스포츠 팀 감독들에 의해 널리 애독되고 있는 손자병법

 

이는 깊이있는 통찰력을 길러주고 혹시 모를 미래의 전쟁에 대한 대비책이 되어 줄 수 있다

 

또한 일상 생활에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하는 순간에 적절한 가르침을 내려주는 교양서로서도 유용하다

 

 

 


마무리

1. 세계 3대 병법서로 통하는 손자병법은 오늘날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두루두루 애용된다

2. 본디 병법서이기에 통찰력을 길러주며 혹시 모를 미래의 전쟁을 대비함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3. 요즘 나대는 대한민국의 주적을 처리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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