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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끄적임

내가 조선을 싫어하는 이유

by 방구석포스트 2021.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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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을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신라, 고려시대때  그나마 평등했던 사회구조들이 조선시대 들어서

불평등이 당연해지는 계급구조로 나뉘었고 평등했던 남녀 관계가

여자의 인권은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은 내가 조선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북학의 라는 책을 예로들어 이야기 하려 한다.

 

내가 조선을 싫어하는 이유

 

북학의는 당시 북학파이던 박제가가 쓴 책이다.

북학파는 당시 미개하게 여기던  청나라의 공격으로  조선이 초토화 되고 

청나라와 서양의 기술과 상공업을 받아들이자라고 하는 집단이다.

 

 

 

 

쿠테타를 통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조선 500년 왕국으로 백성들은 가난에 시달렸다.

조선건국신화가 김일성 백두혈통 내용과 비슷하고 고려 역사가 말기가 앞뒤가 안맞은것도

이성계가 쿠테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조작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박제가는 청나라의 실상에 대해 직접 알아보기 위해서 청나라로 직접 가게 된다. 

중국의 수도 북경을 가보고 거기서 느낀점 조선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책이다. 

 

북학의를 보면  미개하게 여기던 청나라의 수준을 보고 깜짝놀란  박제가가

조선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그  심정이 애달프게 느껴진다.

 

박제가가 주장한 수많은 것중에 대표적인 몇가지만 보자.

 

 

1. 수레 사용 권장

 

 

당시 청의 수레 사용을 그린 그림이다. 사람이 말을 타면 말은 한명 밖에 탑승 할 수없지만, 마차를 끌 경우 여러명이 탑승 할 수 있다. 열 사람의 몫을 한 사람이 한다면 나머지 9명이 잉여자원이 된다. 이러한 잉여의 발생은 다른 방향으로 사용 할 수 있고 이러한 누적이 청나라가 발전 할 수 있는 한가지 비결이었다.

 

따라서 박제가는 수레의 이점을 설명함과 동시에 수레의 규격화, 수레의 제작법에 대해서 자세히 적었다.

 

이러한 수레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수레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사람들의 주장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조선의 지형은 산지가 많아 수레의 사용이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 박제가는 중국의 성도 같은 험난한 산간벽지에도 마차가 잘 다니는데

유독 조선만 안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하는 대목을 볼 수 있다.

또한 박제가의 저술에 의하면 고려 때도 수레를 잘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왜 조선만 갑자기 수레가 사라진 것일까?

 

 청나라엔 수레가 이동 및 운반수단으로 보 편화됐지만 조선은 제대로 된 수레 하나 만들지 못했다.

 

 

2. 낙후된 기술

 

 

또 목재를 정밀하게 다듬지 못해 배(船)에 물이나 빗물 이 새어드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물론 여기서 강과 하천을 이용한 배가 있을텐데 왜 언급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배들은 곡류 혹은 기타물품과 함께 사람도 같이 운반했다고 한다.

 

곡류를 적재 할 경우 먼저 배 바닥에 곡류를 쏟아붓고 그 위에 판자를 깔은 뒤 사람이 탑승하는 구조였다고 한다.

이 과정까지는 별 문제가 없는데 가장 큰 문제는 바닥에 누수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곡식의 경우 이러한 누수현상 때문에 물 먹은 곡식들이 썩어버리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반면 청나라의 배는 이렇게 해도 누수현상이 없었다면서 그들의 기술을 부러워하는 대목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도자기는 밑이 거칠어서 밥상이 상하기가 쉽고 유약도 대충발라져 있다. 것은 한국인의 미학이 아니라  도공들이 성실하지 못해서라고 비판했다. 그 때문에 조선사람들은 도자기를 함부러 사용하여 1년에 수백개의 그릇이 깨져 나간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요즈음 우리나라 작가중에는 우리 도자기의 이러한 점을 지적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심지어 그릇을 만들 때 밑에 모래알이 붙은 채 구워내 밥알이 더덕더덕 말라붙 어 있는 것 같고,

이를 끌어당기면 밥상과 탁자에 흠집이 생길 정도라고 그는 기록했다. 

 

 

 

3. 식품 위생상태

 

박제가가 조선 음식 위생 상태에대해 대표적으로 된장을 언급했지.

 

 

장메주 만드는 자는 메주 만드는 시기가 되면 원근 여러 지방의 콩을 모아 삶게 되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모두를 정하게 하지 못한다. 주는 사람도 가려서 주지 아니하고 받는 사람도 씻지 않아서 모래나 좀벌레가 섞여 있다그래도 그들은 예사로 알고 괴이쩍게 여기지 않는다. 그 장을 먹으려고 하면서 그 메주를 더럽게 취급하니 이것은 먹는 우물물에 똥을 넣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또 콩을 삶아서 파선(破船)의 밑바닥에 쏟고는 옷을 걷어붙이고 맨발로 밟는다. 여러 사람이 오르내려서 더럽혀진 배의 바닥에 말이다. 그러나 그 뿐인가!온몸에서 흐르는 담이 다리를 타고 발 밑의 콩에까지 덜어지는 것이다. 흔히 된장 속에서 발톱이나 머리카락이 발견된다

 

 메주를 만들 때 모래나 벌레, 발톱, 머 리카락 등이 들어가는 일이 잦아 “체로 걸러낸 뒤에야 그 더러운 것을 먹을 수 있다”고 그는 한탄했다

 

 4. 남 무시하는 문화

 

청나라의 외유를 마치고 조선에 돌아온 박제가는 북학의 저술활동과 함께 지인들의 숱한 방문을 받게 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외국에 나가는게 쉽지 않아 외국의 실정과 세상을 모르니 그에 대한 인식이 조선과 반도에만 갖혀 있었다.

 

때문에 이렇게 외국을 한번 갔다오면 그 기행담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청에 대한 인식은 매우 편향적이며 비관적이었다. 그들이 과거 여진족에서 시작한 근본도 없는 오랑캐라며 무시, 멸시하는 태도를 견지. 고수 했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 보다 잘 살고, 잘 먹고 도시문화가 발달했어도 그것들을 인정하고 수용하려고 하지 않고 모두가 거짓이라고 믿어버렸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박제가는 자신이 직접 견문한 청나라 기행담을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청나라의 현실태와 그들의 우수한 문화와 경제력, 유용한 도구 등등의 것들의 이점을 설파하며 배울 것을 주장했다.

 

 

 

 

 

 

 

5.주거 문제

 

가옥 편에는 중국이 집을 어떻게 짓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국 집은 벽돌로 쌓아서 기울어지지도 않고 춥지도 않다. 

그러나 조선의 집은, 잘 다듬지 않은 재목을 평평하지도 않은 터에 세우고, 재목을 새끼줄로 대충 묶고 기울어졌는지 바르게 섰는지도 살피지도 않는다. 그래서 문에는 틈이 생기고, 방구들은 튀어나오기도 하고 움푹 들어가기도 하여 앉을 때나 누울 때나 몸이 항상 한쪽으로 기운다. 

박제가는 조선의 집이 조악한데는 집을 짓는데 법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백성들은 눈이 있어도 반듯한 것을 본 적이 없고, 손이 있어도 정교한 것은 익히지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공예 기술자들이라 해도 그 또한 이 사람들 중에서 나왔다. 따라서 서로 물들어 버려 모든 일이 거칠고 조잡하기만 하다. 이러한 때에 비록 뛰어난 재주와 밝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미 이런 풍습이 이루어져 있으니 이를 없앨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6. 극도로 낙후된 상업

 

 

박제가의 경제사상 및 경제발전 전략은, 크게 상업을 중시하라는 ‘중상론(重商論)’, 소비를 중시하라는 ‘소비론(消費論)’, 문호를 개방하라는 ‘통상론(通商論)’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한다. 

내편 중 시장항목은, ‘소비가 미덕’이라는 근대 자본주의의 경제적 사고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박제가는 농업을 근간으로 한 조선사회가 미덕으로 여겨온 근검절약보다는 소비를 장려해 생산을 촉진하고 상업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날마다 쓰는 것에 대해서는 제쳐 두고 연구하지 않으면서, 중국의 가옥, 수레, 단청, 비단 등 훌륭한 것을 보고는 “사치가 매우 심하다.”고 말한다. 

사실 중국은 사치하다가 망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검소한데도 쇠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남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 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구슬을 캐는 집이 없고, 시장에서 산호 같은 보석이 없다. 또 금이나 은을 가지고 가게에 들어가도 떡조차 살 수 없는 형편이다. 이것이 정말 검소한 풍속 때문일까? 아니다. 이것은 물건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용할 줄 모르니 생산할 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니 백성들이나 나날이 궁핍해지는 것이다. 

재물이란 우물과 같다. 퍼내면 차게 마련이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그렇듯이 비단을 입지 않기 때문에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7. 최악의 위생상태

 

실학자 초정(楚亭) 박제가(1750~1805년)는 '북학의'에서 당시 한양의 위생 상황을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안에서 나오는 분뇨를 다 수거하지 못해서 더러운 냄새가 길에 가득하며, 냇가 다리 옆 석축에는 사람의 똥이 더덕더덕하게 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기지 않는다. 개똥과 말똥이 사람의 발에 항상 밟힐 지경이니, 밭을 가꾸지 않는다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똥이 이미 남아 돌아가니 재는 모두 길에다 버려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눈을 뜰 수 없고, 이리저리 날려서 많은 집의 술과 밥을 불결하게 하지만, 사람들은 한갓 불결함을 탓할 뿐, 실은 함부로 버린 재에서 생기는 것인 줄 모른다

 

이밖의 북학의에는 수많은 내용이 나온다. 관심있으면 도서관에서 빌려볼수 있을것이다.

일독을 추천한다. 

 


마무리

1. 박제가가 북경을 가고 나서 문화충격을 받고 쓴게 북학의

2. 외세와 청나라를 배척하더라도 그 기술력은 꼭 받아들자고 주장

3. 무시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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